퇴원했다. 남동생이 데리러 와서 별다른 무리 없이 짐을 싸갖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는 응봉동에 들러 자그마한 워킹카트도 중고로 하나 샀다. 날씨가 좋았다. 미세먼지가 많다지만 병원의 공기보다 훨씬 더 맑고 상쾌한 기분이었다.에어컨이 고장난 20년된 소나타의 창문을 활짝 열고 달려서 왔다. 병원의 공기는 아무래도 무겁다. 어딘지 모르게 모든걸 회색빛으로 물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병원 밥은 어찌나 맛이 없는지. 같은 음식이라도 병원에서 먹는것만으로도 맛이 없어지게 하는 힘이 있는듯하다.
퇴원하고 나니 엄마 밥이 참 맛있다. 엄마가 깎아주는 사과도 참 맛있다. 병원 밖에서 맛보는 세상의 맛은 훨씬 풍부한 질감과 맛으로 가득차있다.
병원에 있으면서 들었던 여러가지 생각들 중에 몇가지만 옮겨 적어보려한다.
-먼저 건강의 소중함. 그동안 건강을 얼마나 안 돌봤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몸에 남아있지 않은 근육. 그나마 젊은 나이 덕분에 이 정도인거지 내가 40대나 50대였다면 분명 버텨내지 못했을것이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에 내가 왜 걸렸을까에 대한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지난 10년간 어떤 방식으로 일해왔는지도 말이다. 밤샘은 기본이고, 그 상태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받았던 스트레스. 작년에 파일럿 프로그램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 데이터 날라간 것부터 시작해서 편성 스트레스, 제작비, 속 썪이는 작가들, 좀처럼 올라갈 기미 없이 점점 떨어지던 시청률, 클레임 거는 출연자와 상대하기 힘든 매니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 무릎 속에 다 들어와있겠지. 금요일 모닝와이드 팀장하면서 한주 한주 혹시라도 사고가 날지 몰라 목요일 밤마다 노심초사하면서 후배들 방에 쳐들어갔던 것도 조금은 들어있을거다. 또 다른 스트레스는 뭐였을까. 아마도 가장 큰 건 육아였겠지. 밤늦게 2,3시에 들어와도 8시 즈음해서 언제나처럼 일어나는 아들을 데리고 어린이집에 가야하는 스트레스. 많이 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 집에 돌아와서도 미처 일을 끝내고 들어오지 못해서 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물론 이는 어느 단계에 와서는 많이 접어버렸지만.) 아이가 아플때 멀리서 일해 돌봐주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런 스트레스들이 요 3년간 나를 따라다녔던 것 같다.
어떻게든 일은 해야되겠는데 아이 키우기는 벅차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 콩알만치도 없던 삶. 그게 결국은 무릎 안에서 곪고 곪았던게 아닐까. 그리고 결국에는 주먹만한 시멘트 덩어리를 넣어야 했던것 아닐까. 그 주먹만한 시멘트 덩어리가 어쩌면 내 삶에서 빠져나간 뭐 낭만이라면 낭만일 수도 있고, 여유라면 여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처럼 밋밋하고 빡빡해진 삶 같아서.
여하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중요한건 이렇게 아픈 순간에도 일 자체를 그만둔다거나 일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쉬고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머리가 잘 굴러가고 이것저것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것들이 떠오른다. 오히려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훨씬 과감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극한의 노동환경 속에서 일과 육아와 건강을 지키기란 정말 얼마나 어려운가. 현재를 살아가는 전문직 여성한테 아프지 않고 건강도 지키면서 나머지를 잘 해내라는건 얼마나 버거운 요구인가를 많이 느끼는 며칠이었다.
- 또다시 여하튼. 그렇다면 어떻게 건강을 지켜야 할것인가. 운동을 반드시 해야 한다. 지난 3년간 쉬었던 운동을 그냥 . 무조건. 아무 조건 없이 다시 해야 한다. 수영을 해야될수도 있고 헬스 일수도 있고 자전거 일수도 있고 무조건 다시 해야한다. 생존방법이다. 그걸 위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필요하다면 아이 보는 시간도 줄여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 수 없다.
-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한다. 그냥 작년 무렵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대박프로그램'을 만들어보겠다라는 기대를 애초에 접는게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냥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묵묵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평균 이상의 성과, 평균 이상의 관심, 이런 것들이 사람을 옥죄게 만드는 첫번째 조건인 것 같다. 운이 좋으면 좋은 아이템 좋은 기회를 만나는거고 아니면 그냥 아닌거다.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만큼 아이디어를 내고 무리하지 않는 선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 다음부터는 좀 잊어버리면 되는거다. 그 훈련을 이번 계기로 한번 해보는거다.
- 세번째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거다. 왜 일을 못하는지 왜 성격이 모난지 책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움받을 수 있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미워하지 않는 자비로움도 필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작년에 내가 정말정말 너무너무 미워했던 *씨. 그분이 이 병과 연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보냈던 증오에 가득한 카톡메시지들. 그분이 내게 퍼부었던 말들. 그말들이 가슴에 맺혀서 정말 한없이 답답해졌던 그때 생각해보면 그냥 무시해버리고 잘라버렸으면 되는거였다. 괜한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도 감정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잘된듯도 싶다. 기왕 이렇게 된거 당신 얼굴 안 봐도 되니까 좋소. 다시 마주쳐도 인사도 안하고 그냥 원래 살던 대로 살아보겠소. 어차피 이렇게 될 요량이었으면 당신이 나를 비난함으로 인해서 당신이 얻을 소득은 없소.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거였다. 그러니까..내가 바보같은거였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될것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