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가까이에 있을까. 아니면 저어 멀리 있을까. 죽음의 바로미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이라고 해봤자, 친할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조부들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분명 '상실'의 이미지이긴 했지만, 철저히 타자화된 상실이였다. '죽어야 되는 사람은 언젠가 떠난다'라는 좀 교과서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
아마도 아직까지 내 삶에 있어서 '갑작스런 죽음' 같은 건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지금껏 모든 죽음은 예견된 죽음, 과도 같았다. 그래서 갑작스런 죽음 같은 건 상상 속에서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간혹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미어져 온다. 실제로 눈에 눈물이 맺히기도 하고,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반면 아빠의 죽음을 생각하면 굉장히 쓸쓸해진다.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르고, 밤중에 등을 켜놓고 혼자 책상에 앉아계신 아버지의 집중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무표정한 얼굴의 앞모습도 떠오른다. 분명 아빠는 지금도 외롭고, 가실 때도 그런 외로운 얼굴일 것 같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별다른 느낌은 없다. 할아버지는 살면서 본인이 원하는 건 대부분 얻으셨다.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부인 빼고는. 그 세대 치고는삶이 안온하고 평탄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 울컥하는 느낌은 없다. 반면 연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해도 별로 상상이 안된다. 죽을 병, 교통사고, 혹은 어느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난다,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오열하는 내가 없다. 오히려 반대의 이미지가 더 익숙하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나가는. 나를 그리며 슬퍼하는. 이런 이미지들은 사실 글로 옮기면 대개 유치해지기 마련인데 그걸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걸 잊어버릴만큼 강렬해진다.
확실히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죽음의 크기를 키우는 과정과도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특히나 시사프로그램을 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접했다. 덕분에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죽음을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속의 어딘가에서 키워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끔 덩치만 커진 채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 감정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면서 유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감정이 좀더 생생해질 수 있도록. 죽음을 그냥 아무런 감흥 없이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를 자주 접하는 건 분명 내안의 죽음이라는 감정 덩어리를 무뎌지는 일이다. 나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에 대한 아이템을 하던 당시, 10명의 시체 사진(부검사진까지)를 수십번씩 들여다봤다. 지금도 그 사진의 형상을 너무나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차, 2차,3차..10차 피해자까지..그들이 누워있던 농수로나 , 그들의 눈을 파먹던 벌레, 이미 썪은 백골, 발가벗겨져 있는 나체와 그 시체를 엉성하게 덮고 있는 붉은 옷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되어버린 음부, 치켜뜬 눈. 같은 끔찍한 이미지들을 온전히 기억한다. 한동안 나는 그 환영에 시달렸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그 사진속의 이미지들을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그 사진이 떠오르면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나는 마치 그들 중의 하나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죽기 직전에 공포가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대로 전이되는 듯한 느낌이라서 나도 상상속으로 그들을 조용히 응시하곤 했다. 분명 원치 않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그런식으로 죽길 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는 '원치 않는 죽음'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내게도, 내 주위 사람에게도. 그래서 그 공포가 마음 속에서 조금 사그라들고 나면 '고맙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해보고 가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줘서. 우리 프로그램은 그 이외에도 실로 많은 죽음을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자주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상상한다. 김해 실종사건의 여인들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화성사건의 여자들처럼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잔상을 남기는 죽음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그 누구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끔찍한 잔상은 정말이지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내 주위에 누군가도 그러한 잔상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하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이라고 해봤자, 친할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조부들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분명 '상실'의 이미지이긴 했지만, 철저히 타자화된 상실이였다. '죽어야 되는 사람은 언젠가 떠난다'라는 좀 교과서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
아마도 아직까지 내 삶에 있어서 '갑작스런 죽음' 같은 건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지금껏 모든 죽음은 예견된 죽음, 과도 같았다. 그래서 갑작스런 죽음 같은 건 상상 속에서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간혹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미어져 온다. 실제로 눈에 눈물이 맺히기도 하고,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반면 아빠의 죽음을 생각하면 굉장히 쓸쓸해진다.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르고, 밤중에 등을 켜놓고 혼자 책상에 앉아계신 아버지의 집중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무표정한 얼굴의 앞모습도 떠오른다. 분명 아빠는 지금도 외롭고, 가실 때도 그런 외로운 얼굴일 것 같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별다른 느낌은 없다. 할아버지는 살면서 본인이 원하는 건 대부분 얻으셨다.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부인 빼고는. 그 세대 치고는삶이 안온하고 평탄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 울컥하는 느낌은 없다. 반면 연인의 죽음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해도 별로 상상이 안된다. 죽을 병, 교통사고, 혹은 어느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난다,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오열하는 내가 없다. 오히려 반대의 이미지가 더 익숙하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나가는. 나를 그리며 슬퍼하는. 이런 이미지들은 사실 글로 옮기면 대개 유치해지기 마련인데 그걸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걸 잊어버릴만큼 강렬해진다.
확실히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죽음의 크기를 키우는 과정과도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특히나 시사프로그램을 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접했다. 덕분에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죽음을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속의 어딘가에서 키워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끔 덩치만 커진 채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 감정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면서 유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감정이 좀더 생생해질 수 있도록. 죽음을 그냥 아무런 감흥 없이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를 자주 접하는 건 분명 내안의 죽음이라는 감정 덩어리를 무뎌지는 일이다. 나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에 대한 아이템을 하던 당시, 10명의 시체 사진(부검사진까지)를 수십번씩 들여다봤다. 지금도 그 사진의 형상을 너무나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차, 2차,3차..10차 피해자까지..그들이 누워있던 농수로나 , 그들의 눈을 파먹던 벌레, 이미 썪은 백골, 발가벗겨져 있는 나체와 그 시체를 엉성하게 덮고 있는 붉은 옷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되어버린 음부, 치켜뜬 눈. 같은 끔찍한 이미지들을 온전히 기억한다. 한동안 나는 그 환영에 시달렸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그 사진속의 이미지들을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그 사진이 떠오르면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나는 마치 그들 중의 하나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죽기 직전에 공포가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대로 전이되는 듯한 느낌이라서 나도 상상속으로 그들을 조용히 응시하곤 했다. 분명 원치 않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그런식으로 죽길 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는 '원치 않는 죽음'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내게도, 내 주위 사람에게도. 그래서 그 공포가 마음 속에서 조금 사그라들고 나면 '고맙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해보고 가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줘서. 우리 프로그램은 그 이외에도 실로 많은 죽음을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자주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상상한다. 김해 실종사건의 여인들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화성사건의 여자들처럼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잔상을 남기는 죽음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그 누구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끔찍한 잔상은 정말이지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내 주위에 누군가도 그러한 잔상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