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21주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더이상 똥배의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바가지를 엎어놓은듯한 행색이다. 바지가 안 들어간지는 이미 오래다. 심지어 어느날은 찌뿌둥하게 자고 일어났더니 엉덩이와 허벅지에 나무등걸처럼 살이 쩍쩍 갈라져 있다. 임신 전만 해도 아침은 때로는 그냥 건너뛰고도 잘만 다녔는데, 이제는 서너시간 간격으로 배가 고파서 입안에 뭔가 물고 있지 않으면 거의 졸도할 지경에 이르렀다. 몸무게는 정확하게 5kg이 불어났다. 단순히 배만 나오면 좋으련만, 가슴 아래로는 죄다 부피가 늘어났다. 허벅지, 엉덩이, 가슴, 팔뚝 안 찐 곳이 없다. 그렇게 정확히 5개월. 몸은 정직하게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질적인 변화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진만큼 걸음도 무거워지고 느려졌다. 12시를 항상 넘겨가며 일했던 몸은 이제는 9시만 되도 동동거리며 이제는 그만 쉬어도 되지 않냐고 보챈다. 잠은 정확히 2시간 더 잔다. 앞뒤로 1시간씩, 밤 11시반 취침. 그리고 아침 8시 반 기상. 그렇게 꼬박 9시간을 자고나도 낮에는 종종 피곤이 어깨위로 몰려와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이 모든 변화가 임신을 모르고 있던 한달, 열심히 취재다니다가 쓰러져 앓아누웠던 두번째달을 제외하고 세번째달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몸이 둔해지는 것도, 때로는 배가 당기는 것도, 야외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이 모든게 빗방울이 종이를 적시듯 점차 익숙해진다. 탕목욕을 못하는 것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등산을 못하는 것도, 자전거를 못타는 것도, 뜀박질을 못하는 것도, 그리고 취재를 못 나가는 것도. 심지어 사랑하는 짝과 관계를 못하는 것 마저도. 익숙해진다.
익숙함,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회사에 입사한 뒤 만 6년이 넘게 정말 달리기만 했다. 쉬는 날은 손에 꼽고, 언제나 '오늘 해치워야 되는 일'과 함께 끝없는 창작의 나선 속에 깊이 말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편집을 어떻게 더해야 할까, 누구를 어떻게 섭외해야 할까. 오늘 인터뷰에 나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같은 생각들. 그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 수영을 하면서도, 주말에 모든걸 털어내고 월요일을 준비하는 일요일 저녁에도 끊임없이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어찌보면 자유롭게 떠다니는 민들레씨앗 같은 생각이라기보다는 필사적으로 주어진 시간안에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 우겨넣듯이 밀어넣은 소스들 중에서 좋은 것들을 선별하고, 정리해서 들고나가는 사고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는 길은 무념무상에 가깝다. 더이상 어떻게 하면 프로그램을 더 잘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인터넷 쇼핑에서 뭘 사야 하는지 고민하고, 그냥 풍경을 본다. 대체로는 멍-한 느낌이다. (물론 빈도가 줄어들었다뿐이지 회사에 도착할 즈음이면 다시 두뇌는 노동모드로 재가동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멍-한 상태를 일종의 휴지기로 두면서 다시 1년이 지난 뒤에는 팽팽 돌게끔 재가동시킬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너무 익숙해지는게 아닐까. 아니, 아이를 낳으면 더 나아가 책과 영화는 커녕 아이의 표정과 몸짓이라는 단순하고도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을 보느라 세상과 나를 너무 단절시키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아닌 의심도 해보게 된다.
그래도, 요즘의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해주는게 있다. 태동, 이라고 흔히 부르는. 간헐적으로 뱃속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꼬물락거림. 배가 고플 때 꼬르륵 하는 느낌의 더 강한 버전 같기도 하고, 두터운 뱃살 안쪽으로 아주 연약하고 힘이 없는 누군가가 노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복주머니에 넣어둔 커다란 공이 복주머니를 흔들흔들 움직일 때 제 스스로 위치를 바꾸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움직임은 결코 내 의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그 건드릴 수 없는 자유로움. 예컨대, 앗 녀석 움직인다, 하면서 손을 갖다 대면 마치 숨바꼭질 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있는다던가, 엄마가 조금이라도 피곤해질라치면 발을 구르면서 집에 가자고 하는 어린아이처럼 쿵쿵대면서 몸을 울린다던가. 내 몸안에 통제불능한 뭔가가 존재한다는 자각. 그냥 지방덩어리처럼 부풀어오르기만 하던 내 배 안에도 무언가가 분명 살고 있구나, 하면서 느끼는 묘한 쾌감. 그걸 요즘 흠뻑 느끼고 있다. 어쩌면 임신을 하게 되면서 몸이 불고, 움직임이 둔해지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맘껏 못하게 되면서 느꼈던 '마이너스의 기분'을 태동,이라는 것이 나를 끊임없이 플러스극으로 인도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임신 5개월. 많은게 변했는데, 앞으로는 대체 얼마나 변하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