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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전시] 최우람 개인전

시봉 2013. 1. 12. 14:22

별도 촬영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망설였다. 그만큼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대단한 전시였다. 출근길에 갤러리 현대를 지날 때마다 그 생각을 했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 전시가 끝났다.지금은, 촬영을 해두지 못한게 정말 후회된다. 당장 쓸 데도 없고, 설마 몇년 후 다큐멘터리에 인서트 컷으로 삽입된다고 할지라도 어떤 용도로 써야 할지 확실치도 않으니. 하지만 시각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들이었고,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작가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소개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최우람은 한국의 대표적인 키네틱 아티스트라고 해서 진중권이 자신의 책에서 일찍이 소개해놨다. '기술과 예술의 조화'라고 얘기하는 게 허풍이 아닐만큼 작품들은 기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제작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정말이지, 살아있다고 느낄 정도로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생명체'를 구현해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바람에 흩날리듯, 아니면 알에서 깨어나듯 정교하고 동적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기계에 생명을 입히는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였다. 기계에 덧씌운 신화적인 내러티브는 오시이 마모루를 연상시켰다. 그가 애니메이션으로 사이보그의 이야기를 했다면, 최우람은 오시이 마모루의 아티스트 버전이다.

작품들 중 압권은 <Custos Cavum>이다.

 

주석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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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두 세계는 작은 구멍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마치 숨쉬는 것처럼 서로 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구멍들은 자꾸만 닫히려는 성질이 있어서, 각각의 구멍 옆에는 늘 구멍을 지키는 수호자가 하나씩 있었다.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이라 불리던 이 수호자는 바다사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늘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커다란 앞니로 구멍을 갉아 구멍을 유지하였다.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 들이 어딘가 새로운 구멍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게 되면 깊은 잠에 들어가고, 죽은 듯 자고 있는 그 들의 몸통에서는 유니쿠스(Unicus)라 불리는 날개 달린 홀씨들이 자라 났다.
이 유니쿠스(Unicus)들은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의 몸통에서 떨어져 다른 구멍으로 날아가 새로운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으로 자라나 새로 생겨난 구멍을 지켰다.
하지만 어느 날, 다른 세계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점차 사라지면서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들은 힘을 잃어갔고 하나씩 하나씩 죽어갔다. 결국 마지막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마저 죽어가자 마지막 구멍도 닫혀버리고, 두 개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완전히 지워졌다. 어제밤 나의 작은 마당에 마지막 남은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뼈에서 유니쿠스(Unicus)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세상 어딘가에 다른 세상과 통하는 구멍이 다시 열렸을 때 그들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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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서사다. 차가운 기계에 순식간에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순간이다. 기계에 천을 입히고, 색색깔의 칠을 하고, 혹여나 깃털로 데코레이션을 했다면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의 뼈대와 나사나 볼트너트 같은 구조물이 훤히 들여다보이기에 이같은 내러티브가 힘을 얻는다. 속이는 게 아니라 감상하는자 스스로가 작품을 보면서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작품은 실상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쇳덩어리들 뿐이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작은 기계 부속품들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숨쉬는 듯한 규칙적인 동작들과 스토리만으로도 이 모든게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어린 시절 나도 동생들에게 종종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들려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각종 신화와 동화책 속 이야기들을 짬뽕해놓은 얘기였다. 어찌보면 유니콘과 용, 공주와 왕자, 마술사 같이 어떤 문화권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상징물들을 제 나름의 서사 속에 묻어만 놔도 신화의 원형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해가며 우리의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최우람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을 구현해놓았다 . 차가운 금속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해내고 싶어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