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의 집_노석미

서른살의 집_노석미 접어놓은 페이지들 2013. 6. 30. 12:24

_나는 일단 만의 서류를 작성해주었다. 한국인인 내게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웠다.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갑자기 너나 할 것없이 자신들의 신분증명서를 내밀며 서류작성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몇몇의 서류작성을 도와주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내게 서툰 한국말로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해요? 대단해요!" "엥? 그거야 제가 한국 사람이니까요." "한국 사람이에요? 와! 외국 사람인 줄 알앗어요."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나를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로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이 여기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만이 관리소 직원에게 심사를 받아야 할 차례가 다가왔다. 만의 차례 바로 앞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에게 관리소 직원이 서류가 미비하니 다시 준비해오라고 얘기했는데 그는 그 말 자체를 못 알아듣고 있었다. 어리바리 서 있는 그에게 관리소 직원은 답답하다는 듯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반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니었으니 그냥 지켜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외국인 노동자는 눈치를 보다가 그냥 자신의 서류를 돌려받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돌아가는 그의 눈빛은 온 세상이 무너진 듯 비참해보였다.

_중심을 잃지 않고 생활하려면 며차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도 환경이 절대적이다. 이를테면 귀 옆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 말이다. 어쩌면 모든 것은 횟수의 문제다. 얼마나 자주 무수히 일어나는 불편한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위안할 수 있는 평안함에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_언제나 그렇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시간이 열정을 앞선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파도로 다가온 특별한 사랑이라고 해도 평범한 누군가에게 내어준 시간을 능가할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오랜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다.

_젊을 때는 내일이 올 것 같지 않게 행동한다. 오늘, 지금 당장 이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생생함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실제로 젊을 때보다 생이 조금 더 남아있음에도 말이다. 오늘 하루를 벅차게 보내면 내일이 힘들 것을 알기에 인내와 자제력을 갖게 된다. 모든 것에 태도가 조금씩 의식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 사람을 대하는 것, 공부를 하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 등 어쩌면 우리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기에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현실적 죽음이 결코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시절의 죽음은 그것조차 화려하게 느끼는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Posted by 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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